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리 채플린 (문단 편집) === 유년기 === 정확한 출생지는 호적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지만, 채플린 자신이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로는 사우스 런던의 빈민촌인 월워스(Walworth)라고 한다. 할머니가 롬(Rom)족, 흔히 말하는 [[집시]]라서 채플린에게도 집시의 피가 흐르는데, 채플린은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후에 채플린이 쓰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편지에 따르면, 채플린은 1889년 남부 런던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웨스트 미들랜즈 지방의 집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 편지에는 '당신(찰리 채플린)은 버밍엄에서 가까운 스메스위크의 블랙 패치(Black Patch) 지역 집시 퀸에 속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라는 글이 담겼다. 채플린이 태어난 1880년대에 그곳은 버밍엄 변두리 산업지대 집시족 마을이었고 따라서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채플린은 집시의 피가 흐르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집시인 셈이다. 부모가 모두 무대 연예인이었는데, 아버지인 '찰스 채플린(Charles Chaplin Sr., 1863년 3월 18일~1901년 5월 9일)'은 런던 뮤직홀에서 약간 이름난 가수였고, 어머니 '해너 채플린(Hannah Chaplin, 1865년 8월 11일~1928년 8월 28일)'[* 혼인 전 이름은 해너 해리엇 페들링엄 힐(Hanna Harriet Pedlingham Hill)]은 이런저런 연극에서 하녀나 잡역 등 단역을 도맡아하는 직급 낮은 배우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뮤직홀 배우들의 고질병인 [[알코올 의존증|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남편이 [[미국]]에 순회공연간 사이 조지 윌러라는 다른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부부관계가 나빠져 별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후 루이스라는 여자와 재혼하였다. 아버지는 법정으로부터 자식을 양육하라는 책임을 졌음에도 전처랑 형인 시드니와 찰리에게 파운드화 지폐는 고사하고 동전 한 푼조차 주지 않았고, 어머니인 해너가 정신병원에서 나와 찰리 & 시드니와 재회한 후에서야 약간씩 돈을 보내줬다고 한다. 또한 찰리는 아버지가 죽기 몇 주 전에 술집에서 아버지와 만났는데 아버지가 (아마도 술김에) '''일평생 유일하게''' 아들을 껴안고 키스했다고 회고했다. 찰리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뮤직홀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매상을 올리기 위해 공연 중 술을 마셔야 했는데, 이게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 것. 그래서 찰리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아버지 찰스를 '''아버지라는 자각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악평했을 정도였다. 한편 어머니 해너는 이혼 이후 목이 상해, 몇 번씩 극단을 옮겨다니다가 결국 연극 일을 포기하고 재봉사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 지경이 되었다. 채플린은 이 시절 겪은 배고픔을 평생 잊지 못했고, 이때의 경험이 훗날 영화들에 반어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채플린의 자서전에서 말하길,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극단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상한 목으로 노래하다 [[삑사리]]가 나서 욕을 먹었고 그런 어머니를 대신하여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채플린은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흉내낸 연기를 하여[*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유행가였던 '잭 존스(Jack Jones)'라는 노래로, 돈 좀 벌었다고 잘난 척 하다가 결국 험한 꼴 당하는 잭 존스라는 사람에 대한 노래였다고 자서전에 나와 있다.] 주점의 군인들한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채플린은 이런 연기를 한 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이 일화는 채플린의 자서전을 토대로 만든 1992년작 영화 <채플린>에서도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는 실제 해너의 손녀인 '[[제럴딘 채플린]]'이 자신의 할머니인 해너를 연기했다.] 어머니는 생활고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여 1895년부터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나머지 정신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정신질환은 심각하여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며 수시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렸고, 찰리는 형과 함께 보육원에 맡겨지거나 아버지와 잠시 지내다가 계모의 학대를 못이겨 다시 나오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12년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일화가 자신의 자서전에 적혀져 있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셨기에 우울한 하루였다. 어머니께선 찬송가를 부르며 날뛰시던 시기를 막 지나서 방에 격리되신 상태였다. 이에 대해 사전에 간호사가 우리에게 경고했다. 시드니(찰리의 형)는 어머니를 뵈러 갔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기다렸다. 형은 침울해져서 돌아오더니, '''어머니가 얼음처럼 차디찬 샤워로 충격 요법을 받으셔서 얼굴이 새파랬다고 말했다.'''[* 이 시절의 영국은 구빈원이나 정신병원이 문자 그대로 개판이었다. [[전두엽 절제술]]이 나타는 것도 이 무렵. 자세한 것은 [[정신병원]] 문서 참고.] 그래서 우린 어머니를 사립 시설로 모셔오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있었으니까. >It was a depressing day, for she was not well. She had just got over an obstreperous phase of singing hymns, and had been confined to a padded room. The nurse had warned us of this beforehand. Sydney saw her, but I had not the courage, so I waited. He came back upset, and said that she had been given shock treatment of icy cold showers and that her face was quite blue. That made us decide to put her into a private institution - we could afford it now. 참고로 해너는 일찍 죽은 남편 찰스와 달리 아들 찰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기에[* 미국에서 살 때의 해너는 정신분열증의 영향인지 간혹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막무가내로 아이스크림을 권하는 기행을 보인 것 말고는 별 일 없이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정신 질환을 앓았어도 자식들과의 관계는 매우 좋았으며, 아이스크림을 권하는 행동 또한 가난했던 시절 푼돈을 모아 자식들과 함께 사먹었던 아이스크림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장례식은 [[할리우드]]에서 치러졌고, 채플린 어머니의 묘소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한 호숫가에 있다. 그러던 중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가 1898년에 자신의 친구가 경영하는 에이트 랭커셔 래즈(Eight Lancashire Lads)라는 아동 극단에 찰리가 입단하도록 주선했고,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극단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가 1901년에 강제로 그를 퇴단시킨 것이다. 한편 형인 시드니는 여객선의 나팔수 겸 급사로 취직했고, 이후 동생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찰리보다 먼저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aplin_in_Sherlock_Holmes.jpg]] (연극 '셜록 홈즈'에서 꼬마 급사 '빌리'를 연기하는 채플린, 1903년~1906년경)[* 한국 나이로 초등학교 6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연을 펼쳤다. 그가 단순히 웃기는 연기뿐만 아니라 정극 연기는 이미 어린 나이부터 완벽하게 해낸 천재임을 나타내는 부분.] 어머니가 정신질환이 재발하여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1903년에는 형의 권유로 '블랙모어 극단'에서 나이를 14세로 속여 오디션을 보았고, 여기서 '[[셜록 홈즈]]' 연극에 꼬마 급사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무려 3개국을 돌아다녔으며, 나중에는 [[런던]]으로 가서 연극 '셜록 홈즈'의 원작자(정확히는 [[아서 코난 도일]]과 공동집필)이자 연극에서 최초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인 '윌리엄 질렛'(William Gillette)[* 흔히 셜록 홈즈하면 떠오르는 구부러진 담배 파이프는 이 사람이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가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사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대의 명배우였으나 작위는 못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과 함께 연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채플린 본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식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1906년 시드니는 당대 거물급 희극단 중 하나였던 프레드 카노(Fred Karno)의 희극단에 입단했고 찰리도 2년 뒤인 1908년에 같은 극단에 들어갔다. 처음에 카노는 찰리를 '너무 소심해 보여서 연기를 못 할 것 같은 청년'이라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찰리는 카노 극단에서 주정뱅이나 건달 등 뒷골목 인물들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묘사하면서 단시간에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1910년에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도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이때의 성공으로 찰리는 [[영국]]보다는 [[미국]]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실제로 찰리 채플린은 영국인인데도 [[영국 영화]]랑 별 연관이 없다. 말년에 영국 영화들을 몇 편 만들기 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1912년에 두 번째로 미국 공연을 갔을 때 맥 세닛(Mack Sennett)이 속한 키스턴 영화사의 전속 계약 제의를 받고[* 당시 채플린이 일하던 극단으로 '당신의 극단에 채핀 혹은 그와 비슷한 이름의 인물이 있다면 연락 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 실수는 몇십 년 후 한 번 더 반복되는데, 마지막 배우자인 우나 오닐과 결혼할 때 주례를 서 주었던, 채플린을 잘 모르던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가 그의 이름을 '채핀'이라고 기입한 것.] 희극 영화배우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이때 찰리는 세넷이 자신의 연기를 안 좋게 본 것 같아서 "[[우린 안 될 거야 아마|난 안 될 거야 아마]]"라며 가기를 주저했는데, 계약을 맺은지 3일째 되는 날에 '''"왜 안 오느냐!"'''라며 재촉하는 전화가 걸려와서 당장 갔다는 루머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